[자공공] 우리는 왜 배우는가: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는 배움의 기예

작성자 haja | 작성일 2017-03-22 18:27:58

우리는 왜 배우는가: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는 배움의 기예

자공공아카데미 오프닝 강연 리뷰

 

 

지난 3월 17일 금요일 오후 4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하자센터 허브홀에서 자공공 아카데미 오프닝 강연이 열렸습니다. 하자작업장학교, 오디세이학교, 영세프스쿨, 로드스꼴라, 산어린이학교 청소년 100여 명을 포함한 200여 명의 시민이 자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날 현장 소식을 강연 요약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연사 엄기호(문화학자,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공부중독」,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의 저자)

 

 

이 강연 제목은 다소 협박 같이 들립니다. 얼마 전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마 늘 하던 대로 해왔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대로, 전임자들이 하던 방식대로 그대로 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촛불 시위자들은 이전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위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보편적 준칙이 급변하고 있는 시대

 

요즘 대학에서는 ‘단톡방 성희롱 사건’, ‘OT 성희롱·성폭력 사건’ 등 여러 사건이 벌어지고 있어요. 단톡방 사건에 연류되어 감옥에 간 학생들은 억울해합니다. ‘왜 나만 걸렸나?’, ‘내가 뭘 특별히 잘못했냐?’, ‘그저 농담한 건데, 왜 나만 감옥 가나?’ 등의 이유로요. 그런데 바로 그렇게 농담했기에 감옥 가는 겁니다. 대통령에서부터 학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이전방식대로 그냥 살다가는 좀 지질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가 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이런 것을 보편적 준칙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 시대는 보편적 준칙, 규범이라는 게 급격히 변하고 바뀌고 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배우지 않으면 감옥 가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직업을 갖고 사회인이 되거나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키거나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고 가장이 되어 가족을 지키거나, 이전까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사회적 존재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회적 자존감을 줬던 것들 역시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자존감이 무너진 상태에서 보편적 규범이나 준칙이라고 하는 것들도 급속도로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누가 제일 억울할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이전 하던 방식대로 공부하고 살던 사람들은 다 억울하게 되겠지요. 촛불시위 이후 ‘이전처럼 살지 않겠다,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난 겁니다. 이 사람들의 결정적 승리의 징표가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입니다.

 

저는 이제껏 학교에서 해온 공부를 ‘배움 없는 공부’라 부릅니다. 우리는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하는데 배우는 게 없어요. 공부하면 할수록 무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삶의 무능력자가 체계적으로 양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는 자의 용기와 가르치는 자의 환대

 

교육철학자 존 듀이는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고 합니다. 우리는 경험을 ‘한다’고 얘기합니다. 경험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영어로 ‘trying(해봄)’과 ‘undergoing(겪어봄)’입니다. 무언가를 하게 되면 겪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불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뜨겁다는 걸 배우죠. 경험을 통해 뭔가 배움이 발생합니다. 듀이는 배움은 겪음으로부터 온다고 봤어요. 해보는 것 자체가 어떤 교훈을 주지는 않습니다. 해봤을 때 뭔가를 겪는 것이죠.

 

우리는 공부를 ‘한다’고 정신이 없어요. 배우기 위해 계속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에 손을 넣었다 뺐다고 바로 배움이 발생하진 않아요. 배움이라고 하는 게 이렇게 즉자적으로 발생하진 않습니다. 불에 손을 넣다가 뺏을 때, ‘앗 뜨거워, 이건 뭐지?’라는 반응을 하지요. 뭔가를 해보고 나서야, 뭔가를 겪고 나서야 나오는 게 질문입니다. 뭔가를 겪지 않으면 질문이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모르는 걸 질문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가요? 모르는 걸 모른다고 드러내는 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는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때문에 질문하는 것 자체는 자랑스러운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학생들이 보통 질문 잘못했다가는 ‘내가 설명하는 동안 집중 안 하고 뭐했냐?’고 봉변을 당하곤 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환대를 받는 경험한 것이 아니라 봉변을 당한 경험을 합니다. 수치심을 느끼면 다시는 질문하고 싶지 않아집니다. 이렇게 질문을 안 하는 상태로 넘어가게 되면 자기가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해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면 궁금해지지도 않아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로 가면, ‘노답’이에요.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고, 까마득한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환대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배움이 발생하려면 배우는 쪽에서는 용기를, 가르치는 쪽에서는 그 용기를 환대해야 합니다.

 

질문하려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겪는다고 해서 바로 배움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시도하는 게 있으면 겪고, 질문하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이라는 걸 통해 배우게 된다. 한 단계 단계마다 다 중요한데 중간 과정을 생략하다 보니 공부하는 게 귀찮고, 재미없어집니다. 학교에서 누가 주로 질문하나요? 모르고 있는 학생보다 주로 아는 학생들이 질문합니다. 학교는 왜 만들어졌나요? 학교는 무식한 자, 무지한 자를 환대해야 합니다. 그게 목적이니까요.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중심에 누가 있어야 할까요? 우리가 경험한 학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중심에 두고 있죠. 그러나 학교는 모르는 자를 중심에 두고, 그 사람들의 질문을 중심에 두고, 환대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는 것

 

모르고 있는 것을 질문하려면 하나는 알고 있어야 해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모르는 게 뭔지 알려면 해봐야 합니다. 배움이라는 게 겪음으로부터 오긴 하지만, 겪음은 또 해 보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자꾸 하다 보면 잘 안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한계’에 부딪힙니다. 우리는 이 한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마도 한계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 극복되어야 하고 돌파해야 하는 것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계를 발견했을 때, 그 순간에 뭘 깨우쳐야 할까요? ‘아, 이게 지금 나구나’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해녀학교가 있어요. 처음 들어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게 물속에서 자신이 참을 수 있는 숨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가르칩니다. ‘내 숨의 길이’를 알게 한다는 것은 그 교육의 목적이 ‘내 숨의 길이’ 그 이상을 하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교육은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받아들이게 하는 게 아니라 ‘넌 할 수 있어, 극복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지치고 소진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시도하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에 걸쳐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아야 무리하지 않아요. 우리는 지금 너무나 무리하며 무리수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네가 하고 싶은 게 뭐야? 그걸 찾아야 해’라는 것으로 들었어요. ‘하고 싶은 것’을 찾아 계속하는 것, 해보는 것trying에만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잘 활용하는 것

 

숨의 길이가 1분에서 5분까지라고 하면 이중 누가 탁월한가요? 다들 5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간이 탁월해진다는 것은 나에게 1분의 숨이 주어진다면 1분의 숨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에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뭘 할 수 있는지 발견하고 연마하는 것이 공부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1분이라는 한계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연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1분의 숨을 잘 다룰 수 있을 것인가를 연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하시길 바라요. 공부의 가장 최종적 목적은 뭔가를 잘 다루는 사람이에요. 다루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 알기 위해서라거나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때문에 공부하는 과정,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할 것은 ‘나는 뭘 다루고 싶은가?’입니다. 내가 뭔가를 잘 다루게 되는 것, 그것을 ‘익힘’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공부할 때, 익힌다고 하죠. 뭔가 하나를 배우면 충분히 잘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거든요. 보통의 학교에서는 ‘여러분 아시겠죠?’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요. 배우고 익히는 게 아니라, 배우고 끝나고 다음 배움으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배우는 게 많은데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익히는 건 어느 정도까지일까요? 잘 다루는 것,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 다른 말로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 그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 공부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자유에요. 공부는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연습을 계속해서 언제 자유로워질 수 있냐면, 내가 다루고 싶은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뭘 다루고 있는가?’, ‘나는 얼마만큼 다룰 줄 아는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입니다.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대단하다고 느껴지지 않을까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멋있게 살아갑니다. 공부하는 목적은 바로 이렇게 멋지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지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멋지게 살기 위해서 공부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럼 뭐가 멋진 것인가요? 뭔가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나옵니다. ‘나만의 스타일’은 주어진 대로 살아온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 되겠죠. 내가 살아가는 내 삶의 방식이 나만의 스타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멋지게 살아간다고들 합니다.

 

 

자유롭게, 멋지게 살아가기 위해서

 

이렇게 자유로워진 사람만이 나 혼자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이 만듭니다. 자유로운 개인, 자유로운 개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에, 뭔가를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사회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같이 궁리도 하고 의논도 합니다. 공동체를 만들고 사회를 도모하고 협력하는 것은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서 나의 무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내가 아는 게 무엇이고 모르는 게 뭔지를 알고, 할 줄 아는 게 뭐고 할 줄 모르는 게 뭔지를 알아나가는 과정. 이것은 바로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자기에 대해 알아나가면서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보다 잘 다루려고 연습하고, 익혀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이것을 얼마나 잘 다루고 있는지 ‘자기를 발견해가는 과정’이 학교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발견해가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꿈꿀 수 있고, 최종적으로는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을 도모해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멋지게 살아가는 것을 도모하는 것이 나 혼자서 하는 노력이 아니라 같이 모여 도모하는 것, 그 자체가 모여 있는 목적이 되는 것이 학교였으면 합니다. 서로서로 훌륭해지는 것, 그것을 공통의 목적으로 두고 함께 도모해보자고 하는 것이 우리가 여기 함께 모여 배우는 이유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멋지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리 | 최은주 (거품, 학습생태계팀) schaum@haj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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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공 아카데미 5

돌본다는 것, 서로 의논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것

 

엄기호 오프닝 강연 우리는 왜 배우는가:죽음의 골짜기를 건너는 배움의 기예’_ 317()

② 첫 번째 라운드테이블 ‘성장과 돌봄: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_3월 30일(목)

③ 두 번째 라운드테이블 ‘사회와 시민 Ⅰ: 위켄즈’_4월 13일(목)

④ 세 번째 라운드테이블 ‘사회와 시민 Ⅱ: 야근 대신 뜨개질’_4월 27일(목)

⑤ 네 번째 라운드테이블 ‘노동의 종말과 시민배당: 나 다니엘 블레이크’_5월 11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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