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초청 강연회 현장 기록(2)

작성자 haja | 작성일 2014-07-30 07:01:08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사회,

아이들의 야생성을 어떻게 되살려줄까 그 두번째 장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초청 강연회에서 오간 이야기들

 

지난 7월 25일 오후 3시 하자센터 신관 하하허허홀에서 열린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초청 강연회는

세월호 이후의 교육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생각과 의지가 모여 시종 진지한 분위기였습니다.

이 날 자리를 같이 하지 못했던 분들을 위해 그의 강연과 이후 질의 및 응답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올려 드립니다.

 

강연 /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통역 / 조은주(동시통역사)

사회 / 김찬호(성공회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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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및 응답

질문자 1 : 강연 준비하면서 독자들에게 사전 질문을 받았습니다. 부산에 사시는 독자인데, “우리 아이는 너무 천방지축이라 길을 들여야겠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저는 우리가 빠지는 딜레마가 그런 것일 수 있겠다 싶거든요. 어린 시절에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서, 권위적인 학교, 그 반대로 핸들을 100% 꺾어버린 부모나 교사들이 적지 않단 말이죠. 비슷한 이야기를 크리스가 이 책에서도 고백하고 있거든요. 크리스의 고백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아동기를 보내면서 겪어야만 했던 권위적 양육에 대한 과민반응, 우리 세대(크리스 세대)의 많은 부모가 저지른 실수가 권위적 양육에 대한 과민반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의 행동을 제한하는데 너무 인색했고, 아이들이 자신을 제대로 관리할 만큼 성숙하기도 전에 너무 많은 권한을 넘겨주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키우려고 했지만, 권위를 지나치게 많이 포기하다가 허황된 자아의식을 심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아이들 스스로 반항 감각을 가다듬을 수 있게 돕기보다는 의도치 않게 부모와 힘겨루기에 힘을 쏟도록 부추긴 셈이다. 즉, 자기 세대 부모들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고백이죠. 저는 이게 우리나라가 지금 이른바 대안교육 판의 많은 부모, 교사들이 겪고 있는 딜레마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 :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문제를 미국의 부모들도 여전히 겪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여전히 헷갈려하는 부모들이 많죠. 사실 어떤 문제를 겪다보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핸들을 너무 다른 반대쪽으로 확 꺾어버리는 경향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저도 책에서 언급하고 나름대로 해결방안을 고민해 봤는데, 미국에 있는 심리학자가 이것을 주제 삼아서 책 한 권을 써냈습니다. 이 심리학자는 여러 부모들의 각기 다른 양육 방식을 연구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연구결과 권위적인 양육방식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다 알고 있죠. 권위적인 양육방식의 반대가 허용적이거나 방임적인 양육방식이 되겠습니다. ‘너 멋대로 다 해라’고 다 놔두는 양육방식이 되겠죠. 그런데 방임적인 양육방식은 권위적인 양육방식만큼이나 잘못된 것입니다. 장기 연구를 통해서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추적연구를 했어요. 결국 성장한 아이들을 조사해 본 결과, 방임적인 양육을 받았던 아이들이 권위적인 양육을 받았던 아이들만큼이나 문제가 많았다는 거죠.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중도를 찾는 방법에 대해서 심리학자가 언급을 했는데요. 중도를 찾기 위해서 일단은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뭐든지 조정해야지 직성이 풀리는 ‘통제를 하는 부모(being controlling)’와 ‘통제력을 유지하는 부모(being ‘in control’)를 구분해야 합니다. 둘 간 에는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통제를 반드시 해야 되는 부모가 바로 권위주의적 양육 방식을 행사하는 부모가 되겠죠. 뭐든지 다 아이에게 지시를 내려서 지시대로 아이가 움직여야 하고,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서 규칙을 지키게 하는 그런 부모가 되겠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 전혀 권한이 없는 거죠. 통제력을 유지하는 부모의 양육방식에도 제한을 분명하게 둡니다. 넘어서면 안 되는 선은 분명하게 아이한테 인지를 시킨다는 거죠. 자야 되는 시간은 언제고, 밥 먹는 시간, 어지른 거 치우는 시간, 이런 거는 다 정해 놓습니다. 이런 제한을 정해 놓지만 통제력을 유지하는 부모는 융통성을 잃지 않는다는 거죠. 통제력을 유지하는 부모는 경우에 따라 아이와 교섭에 들어가는 거죠. ‘지금 정리 안 하겠다고? 그래, 그럼 자기 전까지 하자’이런 식으로 협상을 할 수 있는 유연성은 지녔다는 겁니다. 결국은 그 교섭의 결과, 협상 결과는 부모가 원하는 쪽으로 되는 거죠. 결국은 부모 승입니다. 부모가 원하는 것을 결국은 하게끔 만드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준비되지 않은 아이에게 권한을 과다하게 이양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부모를 조정하려 든다는 겁니다. 결국은 아이가 부모를 조정하려 들고, 그러면 권력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권력 쟁탈전이 벌어지면 모두가 불행해지게 됩니다. ‘안 돼’라는 말이 욕은 아니에요. 아이에게 쓸 수 있어요.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양육하는 부모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이의 독립성을 키우는 것입니다. 결국은 독립적인 하나의 인격체로 아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통제력을 유지하는 양육방식을 택한 부모들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성장단계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지면 거기에 따른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더 많은 책임도 지우고, 더 많은 자유도 준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질문이긴 합니다.

 

질문자 1 : 지금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는 답이 되겠지만, 이미 물을 엎지른 10대의 10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크리스 : 그 어느 때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떤 패턴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굳어졌을 경우 고치는 것이 더 어렵긴 하죠. 10대라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기가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10대에게 이미 줬던 자유를 뺏기가 힘들 수도 있겠죠. 거기다가 덩치는 부모보다 크고, 물리적으로 힘도 세다면, 누렸던 권한과 자유가 몸에 배어 있는 이 아이와 어떻게 관계를 새롭게 할까 고민일 수도 있는데요. 아이를 설득하는 것이 힘들겠지만, 사실 2살짜리 애랑 싸워본 사람은 알 겁니다. 10대만큼 힘들어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2살짜리 애와 논리를 가지고 싸우는 것도 굉장히 힘듭니다.

 

반면, 똑같이 분노에 찬 16살짜리 아이라고 합시다. 거의 성인이 된 아이와는 합리적인 토론과 설득을 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 대화를 할 때는 반드시 부모가 솔직해야 됩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내가 처한 여건, 내 지금 상황을 아이에게 솔직히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살짜리와 대화를 할 때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태도를 취해야 되겠죠.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도 아이에게 화가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6살짜리 자녀를 둔 부모도 결국은 통제력을 유지해야 된다는 인식은 뚜렷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10대 자녀인데, 거의 다 큰 10대 자녀에게 어떤 제한을 두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둔다면 그건 너를 위해서, 라는 걸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자녀의 연령을 불문하고 아이의 행동을 제한하려고 하다 보면 당연히 저항을 하잖아요. 그때 “이 아이가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을 부모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제한을 하면 아이는 당연히 저항할 텐데 그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부모가 투항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나를 싫어할까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 딸 얘기인데요. 제 딸이 16살이 되면서 친구들이 운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파티를 많이 가는데 술을 배우기 시작해서 약간씩 마시고 운전해 돌아오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어요. 당연히 제 아내와 저는 걱정이 됐죠. 딸 세라한테 당연히 ‘파티 가면 안 돼’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신 친구가 운전하는 차에 타면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통금 시간도 확실하게 정해줬죠. 그리고 어딜 가든지 솔직하게 엄마 아빠에게 장소 등을 이야기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은 딸한테 12시까지는 집에 들어오라고 말했어요. 12시까지 못 들어올 상황이 생기면, 반드시 전화해서 말해달라고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12시까지 안 들어왔어요. 그리고 전화를 한 게 12시 15분이었어요. 왜 12시 전에 전화를 못 했는지 설명해 줬는데 지금은 이유를 잊어 버렸어요. 그런데 납득할만한 이유였어요. 12시 넘겨 전화를 했고, 식당에 있는데 술 마신 친구는 없었다고 저에게 설명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식당으로 차를 몰고 가서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라고 말하고, 딸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술 마신 친구도 없고, 별 문제가 없었지만 부모와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시키기 위해 아이를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물론 딸은 기분이 나빴겠죠.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결국은 괜찮아졌습니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딸에게 고래고래 야단을 치지는 않았습니다. 엄마아빠가 너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차분히 설명했죠. 아이는 감동을 받아 절 포옹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제 이야기를 수용했죠. ‘아빠가 지금 내 안전을 걱정하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엄하게 다루고 있구나’라는 것을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는 약속을 어기는 일이 이후로 없었습니다. 주말마다 파티를 다니는 활달한 아이였지만, 다시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질문자 2 : 교사는 아니고 아이들과 부모들을 자주 만나는 사람인데요. 제가 요즘 많이 고민하는 것은 대한민국 아이들이 매우 무례하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상하관계가 뚜렷하고 유교문화가 있기 때문에 연장자에 대한 예우가 중요한 소셜 스킬인데 이런 게 많이 파괴가 된 거죠. 심지어 어떠냐면, 특히 엄마를 대하는 태도를 많이 보게 되는데, 말하는 폼이 여동생이나 누나 정도, 옆집 어린 소녀나 일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부모들도 감정이 있는지라 아이가 그렇게 얘기하면 자기 마음이 먼저 상해 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감정을 채 추스르지 못한 부모들은 내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심한지 알아야 한다며 앙갚음 해주고 싶어 하고 아이들은 별 말도 안 했는데 왜 성질을 부리냐고 대꾸해서 이야기의 본질은 온데간데 없고 두 상처받은 영혼들끼리 난투전이 벌어지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아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잘 가지려면 부모가 자기 자신에 대해 굳건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어려운 거예요. 한국은 사회복지 제도가 잘 되어 있어, 부모가 없어도 아이들이 클 수 있는 환경이 되어가고는 있어요. 그러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적으로 조절이라고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자기 몰입할 수 있는 거리가 주어지지 않은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데 도움을 줄 것인가, 무엇보다 나 자신은 부모로서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가 질문입니다.

 

크리스 : 굉장히 복잡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 문제를 부모들이 겪고 있습니다. 어른에 대한 공경이 매우 중요한 가치관으로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버릇없는 아이들의 행동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 올 수 있겠죠. 이 문제를 분석하다보면, 그 이면에는 아까 말했듯이 과도한 권한을 아이한테 줬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과도한 권한을 주게 되면 그 권한을 가지고 부모를 조정하려고 들죠.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부모 스스로 자존감이 낮으면 자녀에게 마땅히 받아야 되는 존중을 요구하지도 못합니다. 아까 양육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빠뜨린 것이 있는데요. 부모노릇(parenting)이라는 것은 부모로서 아이에게 뭔가를 해주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서 내 자신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 내 자신을 지키는 것도 부모 노릇의 일부입니다.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는데요. 미국의 젊은 부모들은 너무나 안간힘을 씁니다. 완벽한 부모가 되기 위해서 정말 애씁니다. 아이한테 다 퍼주다가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것을 간과한다는 것이지요. 엄마 아빠로서 아이와 이야기할 때, 필요하다면 이런 이야기를 꼭 해야 합니다. “잠깐, 나는 네 엄마야, 나는 네 아빠야, 때문에 나는 너한테 존중 받아야만 해. 그것이 내 욕구야.”라고 아이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요. 미디어에 노출되다 보니까 주변에서도 그렇고 미디어에서도 그렇고 남성이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본다는 것입니다. 어린 남자 아이들이 그런 것에 노출되다 보니 일부러는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불손하다는 것이죠. 엄마를 존중할 줄 모릅니다. 그런 행동을 고치기 위해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애가 보는 앞에서 아빠가 엄마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구요. 아빠가 아이한테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너 다시는 그런 말투를 쓰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엄마한테는 공손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아빠가 직접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증세들이 어느 때든지 아이한테 나타날 수 있는데요. 그래서 더 헷갈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가 아이들이 무기력해지면 이를 극복하거나 잊기 위해서도 저항을 한다는 거죠. 권위에 저항하는 이유가 무기력감을 잊기 위해서, 나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으니 부모한테라도 저항하는 거죠. 이런 증세가 권위주의적 가정에서도 나타나는데, 아주 어렸을 때는 부모가 절대적이라 고분고분하다가 물리적으로 엄마 아빠보다 커지면서 그때부터 저항하고 반항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부모한테 저항하는 10대들은 학교에서 대부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압력 하에 놓여있고, 자신에게 중요하거나 관심 있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몇 시간씩 보내다가 결국은 그 스트레스를 집에서 푸는 거죠. 만약에 여기서 앙케이트를 한다면 하자센터에 있는 젊은 친구들은 부모에게 저항하는 경우가 별로 없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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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3 :  대한민국에서는 진로교육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진로와 관련되어 고민이 많습니다. 오늘 강연 중 코디의 편지 마지막 문단에 공감했는데, 저도 오랜 시간 가지고 있었던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진로교육의 본질이라는 것은 코디가 말했던 것처럼, ‘어떻게 살아야겠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힘’, 그 힘의 정체에 대해서 더 많은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 : 헤리어트 텁먼 학교에서는 진로상담이나 카운슬러라는 개념은 없지만 그런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멘토로 불립니다. 이 멘토와 학생들이 매주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요. 대화 주제도 자유로와서 아무 것이나 멘토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규모가 큰 고등학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데, 학생 수가 워낙 많다 보니 학생 개개인이 투명인간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스스로 믿어버리게 되는 거죠. “나는 투명인간이다”, “나는 중요한 인간이 아니다”라고. 내 자신이 투명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감을 갖기가 굉장히 어렵죠. 그래서 상담이든 진로교육이든 그런 부분에서 자신감을 키우는 것이 본질이겠지만, 그런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서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뭔가를 해야만 자신감이 생겨나는 거죠. 내가 믿는 것,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과 관련해서 실천을 하거나, 행동을 하거나, 뭔가를 만들어 내거나, 이런 것을 직접 겪어봐야 자신감이 자라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행동을 통해서 자기가 인정할만한 어떠한 성과가 나오고, 뭔가 창조해내는 창의력을 발휘해낸다면요. 이건 특히 10대 청소년들에게 중요합니다. 이 때가 자아가 형성되고, 자기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점이고, 그런 정체성이 형성되어야 자신감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잖아요. 교과과정에 포함된 것도 아니고, 학습에만 매몰되어 있죠. 시험을 치르고 통과해서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는 것 위주로 설계되어 있는 교과과정 속에서는 실천과 행동을 통해서 자신감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 어렵습니다.

 

소위 말해서 실적을 냈을 때 자신감이 생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젊은 친구라도 업적을 남겼다라고 스스로 인정했을 때, 거기서 자신감이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서 너 똑똑하다고 칭찬을 아무리 많이 해줘도 그런 칭찬에서 자신감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내가 스스로 했을 때, 그것을 나 자신이 인정할 수 있을 때, 내가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뭔가를 스스로 이루었을 때, ‘나 참 잘했구나’, ‘내가 뭔가 해 냈구나’ 라고 스스로 인정하면서 생기는 것이 자신감이지, 칭찬에서 자신감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도왔다거나 내가 최선을 다해서 뭔가를 이루었다고 스스로 인정했을 때, 그 때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신감을 키울 수 있는 행동과 실천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책임도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헤리어트 텁먼 학교에서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학교 운영에 필요한 의사결정에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해서 학교 공동체가 위협을 받았다면, 교사들과 학생들이 다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같이 찾아내는 것이지요. 학생들이 책임을 가지고 공동체에 참여하고, 학교라는 공간이 운영되는 거죠. 학교라는 공간뿐만 아니라, 하자센터와 같이 젊은이들이 참여하는 공간에서 공간을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의사결정에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면 ‘어른들이 나를 믿는다’, ‘내가 책임 있는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나한테 이만큼의 책임을 준다’라고 의식하게 되고, 그 권한을 행사하게 되면 거기서 말한 자신감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코디가 말한 자신감이 아닌가 합니다.

 

질문자 4 : 강연 중에 ‘우리 자신이 아닌 외부의 것에 대한 의존이 가장 위험한 적이다’라는 말씀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나 잘 인정할 수 없는 사람, 특히 청소년들한테 이런 것을 잘 알려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구요. 두 번째는 규모에 대한 질문인데요. 외부의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이끌어가는, 교사가 됐든, 학생이 됐든,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예를 들면 ‘안전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적정한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요? 특히 크리스 선생님이 계신 프리스쿨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고.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면 안전한 공동체가 형성되고 안정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크리스 : 두 번째 질문에 먼저 언급을 하자면, 제가 아는 학교들 중에는 학생수가 600명 정도 되어도 자율성과 학생들의 참여도도 높고, 학교 운영에 대해서 책임을 가지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자리잡힌 학교도 있습니다. 학생마다 멘토가 있고요. 그러나 규모를 무한정으로 키울 수 없죠. 너무 학교가 커지다 보면 아이들도 개성을 잃고, 심지어는 교사들도 개성을 잃어가면서, 직접적인 대인관계가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미국에는 공립 프리스쿨이 있습니다. 공립이기 때문에 규모는 매우 커요. 그런데 자율을 기반한 프리 스쿨을 지향합니다. 가능한 방법이 유치원생부터 초중고, 12학년이 다 있는 학교입니다. 학급마다 연령통합이 된 것이 규모로 인한 개성상실을 방지하는 방법이었죠. 유치원생부터 12학년까지 한 반에 다 있는 것이죠. 연령으로 반을 나눈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반이 패밀리 단위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죠. 여기 10대 청소년이 있다면 오히려 그 청소년의 아이디어가 더 적합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재 질문은 역시 여기 있는 10대가 답해야 될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요. 사실 우리가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가 몸으로 체화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이가 리더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환경, 책임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다 같이 나눌 수 있고, 문제해결 방식을 같이 찾아 나가는 자리에 참여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자리에도 참여하는 그런 환경에 놓여있다면, 그런 환경에서 자라고 배운다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리더십을 스스로 개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독립적인 사고를 갖춘 사람, 의사결정을 현명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려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이들의 외부 의존성을 차단하는 데 큰 걸림돌은 그들의 독립심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누군가,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환경에 아이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죠. 프롬이 듀이을 인용했던 것이 1930년대 쓴 책이었거든요. 그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외부의 통제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자라서도 의존할 수 있는 환경을 본능적으로 찾아요. 거기 들어가서 안주를 해야만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질문자 5 : 요즘 자주 거론되는 학교붕괴 문제 관련해서 어른이나 교사들이 할 수 있는 학교의 역할이란 무엇인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한국을 벗어나고 싶어서 기를 써서 외국의 학교에 갔지만, 미국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학교폭력이니, 자살, 총기사건도 일어나고 있고요. 일본에서도 스쿨 퀘스트라고 해서 학교 안에서 어른들이 모르는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학교붕괴가 왜 일어나는 것인지 여쭤보고 싶구요. 이런 상황에서 교육자의 입장에서 학교에서 제공해야 될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크리스 : 말씀하셨던 여러 가지 문제가 한국을 벗어나더라도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이 겪고 있는 문제라는 것은 사실이구요. 일본만 하더라도 수백만 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거부하고 있죠. 탈학교를 스스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지금 학교들이 전 세계에서 질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회는 이 청소년들, 학생들에게 계속해서 압력을 더 높이고 있고요. 사실 학교가 질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학교가 사회의 압력 때문에 학업에 몰두하게끔 아이들을 강제한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자기에게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게 되고요. 자기 관심사가 무엇인지, 뭘 좋아하는지 탐색할 수 있는 겨를을 전혀 안 준다는 것이죠. 심지어 방과 후에도 결국은 알고 보면 학업 위주로, 성적과 시험 위주로만 돌아가기 때문에 점점 더 학교의 질은 떨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도 몇 년 전에 고등학생을 둔 부모가 있었는데, 그 자녀가 자살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엄마가 영화감독이었어요. 자살을 기도하는 고등학생들과 관련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고등학생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만들었는데요.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가 되었습니다. 영화에서 인터뷰를 하는 학생들이 반복적으로 하는 얘기가 ‘학교 때문에 미치겠다’ ‘학교에서 받는 이 스트레스가 나를 미쳐버리게 만든다’라고 직접 육성으로 들려주었습니다. 미국의 교육제도에 최상을 향한 경주(race to the top)라는 뜻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통해 학교들을 통제하는 거죠. 학교들 간의 순위를 매기고, 학교들이 학생들에게 계속해서 압력을 행사하고. 그런 프로그램 비판하고 패러디해서 영화의 제목을 ‘아무 데로도 갈 수 없는, 목적이 없는 경주(race to nowhere)’ 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 학교에 대해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빌려서 비판했던 그것들과 반대로 하면 됩니다. 그게 학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다 줄 세워놓고 성적순으로 매기고 시험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잘 아는 것은 본인이기 때문에 본인이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학교에서 만들어야 하고 모든 학교가 하자센터같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하자센터 같은 곳을 모든 학교들이 지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정말 관심 있는 것들, 신나서 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곳이 학교가 되어야겠죠.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리는데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되고, 학업과 상관없는 학교 밖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들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이 되어야 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 아이들이 관심이 없거나 모르는 것이 아닌데, 그런 것에 대해서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 ‘사회 현안을 해결하는데 나도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과 믿음을 학교에서 어렸을 때부터 가질 수 있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처음 시작할 때는 우울한 분위기로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끝날 때 적어도 우리가 크게 잘못한 것만은 아니구나. 이런 물주기라도 있었으니 다행이다 싶습니다. 대안교육과 더불어 여러 가지 현장에서 해 온 일들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 그러면서도 새로운 방향에 대한 탐색이 있었습니다. 아까 코디의 글에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한 마디가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록 및 정리 / 최은주(거품, 학교운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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